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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성비를 찾으러 마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참을 올라 저 멀리 산등성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비각안에 있는 비석을 보았을때의 첫 인상은 에구 이게 그 오래된 신라 적성비인가 하는 실망감이었다.
비록 비석이 오래되어 그 안에 있는 기록들이 오래전에 귀중한 자료이겠지만 나 같이 문외한인 사람은 멋진 그림을 상상하고 올라오는 이로는 적성비에서 보는
남한강의 역사적 지리적 위치가 더 멋드러지는 것은 아마츄어의 생각이 아닐가 싶다.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의 모습은 높이 93cm이며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隸書에서 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
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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