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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미상으로 건축 수법상 조선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소불당(小佛堂;불상을 모시는 작은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임진 왜란때 유일하게 소실을 면했다는 기록이나 그 후 산사태로 화를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단층맞배 기와집으로서 공포( 包)는 네 귀에 세운 기둥 위에만 있을 뿐 이 공포들 사이의 포벽(包壁)에는 화반(花盤;꽃받침 모양의 장식)도 배치되지 않았다.

   기둥머리를 괴어나온 창방(昌枋) 끝을 그대로 첨차(詹遮)로 만들어 공포를 짜올라간 솜씨는 주심포계(柱心包系)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수법 중 하나이다. 좌우 측면의 박공(朴工)머리에 나와있는 첨차들은 모두가 전형적인 주심포집의 첨차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이 첨차들은 그 반대쪽인 안쪽에서는 다포계 건물에서와 같은 원호곡선의 첨차로 변하여 있으며,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친 행공첨차도 또한 그와 같은 첨차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주심포계 건물에서 부분적으로 다포계 양식의 건물에 쓰이는 첨차를 사용한 예는 도갑사 해탈문(道岬寺 解脫門 : 국보 제 50호)이나

   송광사 국사전(松廣寺 國師殿 : 국보 제 56호)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옥개가구(屋蓋架構)에 있어서는 측면의 들보 위에 우미량(牛尾梁)을 이중으로 배치하여 중도리(中道里)와 마룻도리를 받치게 하였는데, 이 우미량은

   주심포계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부재이다. 다른 도리들은 모두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나, 중도리만은 납도리(角道里)로 되어있다.

   지붕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오직 기와 끝에 암수막새(莫斯)만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내부의 법당 바닥은 맨 바닥에 구워서 만든 넓적하고 네모 반듯한 방전(方塼)을 깔았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뒤쪽 중앙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모셨고

   네 벽에는 여러 초화(草花; 풀과 꽃)를 그린 벽화가 둘러 있다.

   단청은 조선 시대의 것으로 근래에 개채(改彩;새로 채색을 함)하지 않았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집체와 지붕의 구성비례를 들 수 있는데,

   좌우 측면의 박공 머리에서 보면 도리의 뺄목은 건물의 규모에 비교하여 상당히 길게 뻗어 나옴에 따라 기둥 사이 간격에 비하여 지붕의 폭이 2배 가까이 될

   정도로 크다.

   이러한 지붕의 크기는 한층 더 무게를 갖게 해줌으로써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매우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준다.

   이 건물은 경상남도 내에서 유일한 주심포계의 집으로서 뒤편에 있는 대웅전의 다포계 건물과 좋은 대조가 된다.

 

 

                                                                                                                                                                                        문화재청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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